초등학교 시절 처음 글을 배울 때 내가 선택(당)한 글쓰기 도구는 연필이었다. 연필 특유의 나무 냄새와 종이 냄새 그리고 그 둘이 맞닿으며 내는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가 좋았다. 그래서인가 나는 그 이후로도 계속해서 연필(때때로 샤프)과 종이로 글을 썼다. 학창 시절의 숙제들과 대학교에서 하는 과제들을 모두 아날로그로 해치워냈다. 물론 대학교에서의 과제들은 연필과 종이에 글을 적은 후에 다시 컴퓨터로 옮겨 적는 지루한 이중작업을 해야 했지만 말이다.
한 때 나에게 연필 뽕을 놓은 어니스트 헤밍웨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인가 내 글쓰기의 방법에 의문이 생기기 시작했다. 21세기란 말도 옛 말이 되어버린 시대에 살면서 4차 산업혁명, 블록체인, 디지털 노마드란 말이 일상 속에 깊이 자리한 이런 시대에 연필로 글을 쓰는 것을 고집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가라는 의문 말이다. 특히나 긴 글을 적을 땐 더했다. 내가 하인을 부릴 수 있는 유럽 귀족이거나 돈이 아주 많은 사람이라 내 악필을 보고 컴퓨터로 대필해줄 사람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모를 일이지만 나는 오히려 그것에 정반대에 있는 사람에 가깝기 때문에 내가 쓴 글을 내가 직접 타이핑해야 했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이 일은 꽤나 번거로운 일이다. 심지어 나는 지독한 악필이라 가끔씩은 내가 적은 글을 내가 못 알아볼 때도 있다.
스테들러 몽땅연필을 잔뜩 가지고 있는 김훈 할아버지
그래서 나는 어떻게 했을까. 일단 연필로 글을 적기를 고집하는 글쟁이들을 찾아보았다.(나는 내가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들도 모두 하는 일반적인 행동인가에 관한 모든 내용을 구글에 검색해본다. 예를 들어 최근에는 책을 책상 가운데 놓고 읽는다면 노트북의 위치는 책상의 왼쪽이 돼야 하나 오른쪽이 돼야 하나에 관해 검색해보았다.) 유감스럽게도 내 검색 능력의 한계 때문인지 나는 작가 '김훈'이나 '박완서' 정도밖에 그 예시를 찾지 못했다. 이 얼마나 옛날 사람들인가! 게다가 김훈 선생님은 할아버지가 아닌가! 나는 절망했다. 어쩌면 사실은 내심 기뻤을지도 모른다. 내가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사람이 됐다는 느낌에. 특히나 김훈 선생님이 내가 애용하는 스테들러 연필을 사용한다는 사실에. 하지만 정신을 차려야 한다. 이러한 거짓 우월감으로는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나는 젊은이가 아닌가.
젊은 사람이 anti-digital이 된다면 앞으로의 남은 인생이 얼마나 고될지는 굳이 공들여 상상해보지 않아도 훤히 알 수 있다. 나 같이 아이폰, 아이패드(애플펜슬까지 사용한다.), 맥북, 애플워치, 에어팟을 사용하는 pro-apple 성향의 사람이, 디지털과 대척점에 서있는 연필만으로 글을 쓴다고 고집하는 것은 요상한 컨셉을 잡고 관심을 구걸하는 기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훈련이 필요하다. 십수 년간 연필만을 고집하던 습관을 떨쳐버리고 바뀌어야 할 때다. 키보드로 글을 써보자.